경미한 우울증

 
아주 오랜 시간 공들여서 일기를 쓰려고 한다.
오늘은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날이다.

2010년 스무 살쯤부터 줄곧 머릿속에 박혀 떠나지 않던 생각이 있다. 죽고 싶다는 생각. 왜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 과정은 생각이 나질 않는다. 내가 왜 우울증에 걸렸는지 원인을 짐작조차 하지 못하는 채다, 여전히.
 
 

2011년 6월 23일 일기
살아가고 있지 않다는 느낌이 든다. 돈을 축내고 밥을 낭비하며 아무것도 아닌 채로 있는 것이다.

2013년 1월 11일 일기
진정한 휴식이란 죽음밖에 없다는 생각이 강하게 든다.

2017년 8월 1일 일기
죽고 싶은가? 아직은 그렇다. 그저 실행에 옮기는 게 무섭고, 남을 사람들에게 미안하니까 죽지 못할 뿐이다.

2018년 12월 4일 일기
저번 주 상담 때는 한 시간 내내 죽음에 대해서만 이야기했다. 죽고 싶은 마음, 타의적 자살을 내가 얼마나 염원하는지, 정말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내 자살을 배려해 주고 격려해 주어야 하는 게 아닌지 등등. 그리고 어제 상담에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한 시간 동안 딱 세 마디를 했다. 선생님이 맡았던 내담자 중 자살한 사람이 있었는지. 왜 한강에서 자살하는지 알 것 같다. 그리고 한강 투신을 하면 장기가 상하니 기증할 수 없어서 안타깝다는 말. 그렇게 세 마디를 했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한 시간 동안 그저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이 하나도 힘들지 않더라. 이제 힘들다, 지겹다, 지친다는 말도, 생각도 물린다. 2년 넘게 약을 먹고 상담을 받아 왔지만 내가 다시 자살을 생각하고 또 자꾸만 현실을 잊을 수 있는 일시적 오락거리로 현실 도피하던 대학생 시절로 돌아가려고 하는 걸 보면 그렇게 썩 차도가 있는 것 같진 않다. 여친에 대해서도 계속 부정적인 생각만 들고 그것 또한 내게 어마어마한 스트레스가 된다. 올해까지는 일하지 않고 쉬려고 했는데 어쩌다 보니 또 일을 맡게 되었다. 사실은 전혀 일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면서도.

간절히 바라면 이루어진다는 말은 허상일까? 오 년이 넘는 시간 동안 내가 단 하나 원한 것은 오직 죽는 거였는데, 도대체 언제쯤 죽을 수 있는 건지. 세상에는 부당하게 아깝게 죽는 사람이 너무 많은데 왜 내가 대신 죽을 수는 없는지.

 


언제부턴가는 효율의 문제로 생각했던 것 같다. 하나의 삶을 유지하는 데에는 노력, 사랑, 돈… 너무 많은 게 필요하다. 그런 가치들을 내가 나에게만 쓰는 것도 아니고, 남의 것까지 끌어와야 한다. 그때 나는 내 삶에 그런 큰 가치들을 투자할 이유를 단 하나도 찾을 수 없었다. 나는 그런 가치를 투자할 만한 인간이 못 되는 듯싶었다. 인풋에 비해 아웃풋이 너무 적다. 지구상에서 인간 하나가 사라지면 환경 차원에서도 좋은 일이 아닌가 생각도 했다. 아무렴 내가 없어져서 북극곰 한 마리라도 조금 더 편하게 숨을 쉴 수 있다면 그게 내 삶의 유지보다 유익한 일일 거라고 여겼다.

죽을 생각을 하면 가족 생각부터 났다. 여자친구가 생긴 뒤로는 여자친구 생각도. 그들에게 미안하니까 죽을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상상 속 방지턱을 넘는 순간이 왔다. 사람들이 흔히 그러잖아. 무슨… 그런 말 있잖아. 남을 사랑하기 전에 자신을 먼저 사랑하라든지 그런 말. 나는 나를 사랑하는 방법을 자살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러니 내가 조금 이기적일지라도 그들이 이해해 주어야 한다고. 그들을 배려하기에는 내가 너무 힘드니까, 그들이 날 배려해 주어야 한다고.

그러다 보니 그런 순간이 왔다. 원룸에 살 때, 퇴근하고 돌아와 집에 있으면 어떻게 죽을지만 생각했다. 인터넷으로 자살 방법을 검색했고 몰랐던 걸 새로 알기도 하고, 잘못 알고 있던 방법을 고쳐 생각하기도 했다. 그맘때 집에는 언제든 사용할 수 있도록 매어 둔 매듭이 있었다. 목 매달 매듭. 걸 장소도 골라 두었었다.

내가 정신과에 다니기 시작한 이유는 하나였다. 정말 자살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처음 심리상담소를 찾은 건 2016년 9월 22일. 신경정신과 약물치료를 시작한 건 같은 해 10월 28일. 처음 갔던 정신과에서 10점이면 우울증인데 나는 43점이라고 했고, 불안 정도는 평균이 40점대인데 나는 63점이라고 했다. 안심했던 기억이 난다. 내가 나약하거나 쓰레기인 게 아니라 병에 걸려 있는 상태일 뿐이라는 사실에.
 
 

2016년 10월 28일 정신과 선생님과의 대화
선생님, 우울증 없이 산다는 건 어떤 기분이에요? 내가 나았다는 걸 어떻게 알 수 있나요?
많은 게 달라질 거예요.

 

자살을 생각하던 그 원룸에서 뭘 다 던지고 부수고 그야말로 지랄발광을 한 날도 있다. 그날 와서 원룸을 다 치워 주었던 친구가 나한테 그랬다. 넌 쫄보라서 자살 못 한다고. 그게 아마 자살을 진심으로 체념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였을 것이다. 너무 정확해서. 지금 생각해도 좀 웃기긴 한데……. 가족도 여친도 뭐도 다 넘긴 주제에, 고작 겁이 많아서ㅋㅋ... 자살을 체념하고서는 조금 더 내 자신이 볼품없어진 느낌이었다.

 

2018년 7월16일 상담 선생님과의 대화
전 매일 밤 일기 마지막 줄에 내일은 죽었으면 좋겠다고 쓰고 싶지 않아요. 그게 전부예요.

 

아무튼 그랬다. 대학 생활 내내 그리고 취업해서도, 내 이십 대를 전부 바쳐 나는 죽고 싶었다. 다섯 명 이상의 상담 선생님을 만나고 다섯 군데 이상의 신경정신과를 다니면서도 항상 그랬다.

만나 본 상담 선생님 중 돌이켜 생각해 보아도 가장 감사한 선생님이 계시다. 그 선생님이 추천해 주신 책이 있다. 윌리엄 스타이런의 《보이는 어둠》이라는 책인데 누구에게도 내보일 수 없고, 내보이고 싶지 않아서 누구와도 공감할 수 없었던 감정들이 거기 많이 담겨 있었다.
 
 

사람들이 이 병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대체로 동정심과 공감대가 없기 때문이 아니라, 건강한 사람들의 일상적인 경험에 기초해서는 그 이해할 수 없는 형태의 고통을 근본적으로 상상조차 할 수 없기 때문이다. 21p.

나는 무디고, 무감각하고, 그리고 무엇보다 무기력한 상태가 되었다. 무기력하다기보다는 오히려 기이할 정도로 바스라질 것 같은 기분이었다. 53p.

골드 박사는 나에게 자살 충동을 느끼는지 물었다. 나는 마지못해 그렇다고 대답했다. (…) 사실상 집 안에 있는 모든 물품이 나를 파괴시킬 수 있는 잠재적 도구라는 사실을 (…) 심장마비는 특히 반길 만했다. 심장마비에 전적인 책임을 돌림으로써 나 자신을 무죄방면 시킬 수 있을 테니까. (…) 이런 생각은 기괴하고 소름 끼치는 소리로 들릴 수도 있다. 억지스런 농담으로 들릴지도 모르지만 진심이었다. 64p.

고통에는 사람들이 그걸 경험하면서도 경감에 대한 확신이 있기 때문에 인내할 수 있는 영역이 있다. (…) 그러나 우울증에는 이와 같은 구원에 대한 신념, 혹은 궁극적인 회복에 대한 신념이 존재하지 않는다. 고통은 가혹하다. 이처럼 가혹한 상황을 더욱 못 견디게 만드는 것은, 손쉬운 치유책이 가까운 장래에 나타나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스스로가 알고 있다는 점이다. 만약 그럭저럭 견딜 만한 치료법이 있다고 하더라도 일시적일 뿐이며 더욱 극심한 고통이 뒤따를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다. 74p.

 

이런 문장들을 읽으며 나는 정말 정말 정말 많이 공감했고 위로받았다. 그래서 마지막 몇 장을 남겨 두고 ‘정신 병원에 입원했다’라는 문장이 나왔을 때 무척 고통스러웠다. 결국 이 책도 ‘그리고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정도의 내용으로 끝나겠구나 싶어서. 사실 그런 끝 같은 건 없는데, 그래도 책이니까 어쩔 수 없이 완치 판타지를 넣었겠구나 싶어서. 그래서 그냥 거기서 책을 덮었다. 한 사나흘 지나서야 다시 그 부분을 펼쳤다. 작가를 향한 의리와 감사의 마음으로.

그런데 믿을 수 없는 문장이 나왔다.

 

우울증의 끝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면 자살이야말로 사실상 유일한 치료일지 모른다. 그렇다고 우울증이 영혼의 절멸은 아니라고 강조하거나 아니면 고무적인 말을 할 필요는 없다. 이 병에서 회복되었던 사람들이야말로─무수히 많을 터인데─은총을 입증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우울증은 극복할 수 있다는 사실 말이다. 102p.

 

나는 이 책의 마지막 문장을 손목에 새겨 가지고 있다.
 

우울증이 나으리라고 생각한 적 없다. 날마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 몰라도, 가끔 마음 편하거나 가끔 행복할 수 있어도, 결국 나는 죽는 날까지 죽고 싶어 할 거라고 믿었다. 지친다는 말이 지쳤던 것처럼 죽고 싶다는 생각도 지치게 되는 날이 오겠거니 생각했다. 십 년이 넘게 우울증을 앓았는데 그 시간 동안 내내 자극적으로 비극적일 수는 없으니까.

사실 나한테 우울증이 왜 왔는지 모르는 것처럼 우울증이 왜, 어떻게 나았는지도 모르겠다. 그저 언제부턴가 아주 천천히 눈치채지 못한 속도로 나아져 가고 있었다. 더 이상 자살 방법을 고민하지 않았고,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 날이 점점 늘었다. 즐거운 하루를 보내고 돌아오는 길에 이게 나에게 가당한 감정인가 내지는 이제는 다시 우울할 일만 남았구나 더럭 마음이 내려앉아 결국 스스로 즐거운 하루의 끝을 망치는 일이 줄었다. ‘오늘은 우울한데 우울증이라서 우울한 건 아니고 그냥 현대인이라면 보통 겪는 정도로만 우울하다’라고 생각하는 날이 생겼고, 많아졌다.

작년 9월쯤엔가부터 정신과에 가지 않았다. 약을 먹으나 안 먹으나 크게 다르지 않았다. 좋은 의미로. 내가 정말 괜찮은 걸까 불안하지도 않았다. 2016년 약물 치료를 시작하고서 처음 있는 일이다.

오늘 신경정신과를 반년 만에 다시 찾았다. 우울이나 불안이 아니라 수면 문제로. 초진이라 이것저것 검사를 하고서 진료를 받으러 들어갔다. 애초에 나는 수면 문제 때문에 온 거여서 그 얘기만 했는데, 의사 선생님이 지나가듯이 말씀을 하셨다. 우울이나 불안은 경미한 수준이네요.

그게 오늘 내가 일기를 쓰는 이유다. 경미한 수준. 나는 단 한 번도, 2016년 초겨울부터 작년까지 정신과를 다니며 단 한 번도 내 정신병에 그렇게 후한 평가를 받아 본 적이 없다. 나는 오늘 엄청나게 많이 울었다.

경미한 질병이라면야 현대인은 누구나 두세 개씩은 달고 살지 않나? 그러니 상관없다. 또 어쩌면 평소에는 크게 불편하지 않아도 속내에 도사리고 있다가 불현듯 튀어나와 날 많이 힘들게 할 수도 있으리란 걸 안다. 그러다가도 반드시 다시 사그라들 것도 안다.
나는 이제 괜찮다. 더 이상 '괜찮은 것 같다'거나 '괜찮을 수도 있다'고 쓰지 않아도 괜찮을 정도로.
그리고 난 살고 싶다. 이왕이면 즐겁게.
 
 
죽고 싶었다가 안 죽고 싶어진 얘기를 쓰느라 불안증이나(회사에서 일하다가 구급차 사이렌 소리만 들려도 집에서 키우는 햄스터가 죽었을까 봐 울었다 근데 회사 맞은편이 소방서였음ㅅㅂ) 기면증(사장님이랑 일대일 면담하다가 잔 적 있음) 얘기는 안 썼다. 겪었던 상담 선생님(기독교 전도당한 적 있음 시간당 7만 원 내고요)이나 병원(아무튼할말많음)에 대해서도 안 썼고. 언젠가 천천히 이야기를 풀어 보고 싶기도 하다. 이제 그저 지나간 옛일로 허심탄회하게 말할 수 있으니까.
 

그리고 혹시… 혹시라도. 내가 얼마나 도움을 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최소한 남들 듣기 불편한 얘기를 나는 들어 줄 수 있을 테니까, 만약 본인이 우울증으로 힘든데 어디 털어놓을 사람이 필요하다거나 조언이 필요하다거나 아무튼 뭐라도 필요하면 연락 줬으면 좋겠다. 나랑 이름도 모르는 사이여도 상관없으니까. 주변에 쉽게 털어놓을 수 있는 종류의 이야기가 아니니까 오히려 거리감 좀 있는 사람이 편할지도? 아무쪼록 한 사람이라도 더, 조금이라도 덜 끔찍해질 수 있다면, 그리고 내가 거기에 아주 작게나마 도움이 될 수 있다면 내 지난 시간이 보람으로 승화할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내가 쫄보임을 자각하게 해 준 내 가장 소중한 친구
그리고 8년을 만나면서도 내 우울에 조금도 전염되지 않고 항상 밝게 빛나 준 내 연인
둘에게는 평생 고마울 거야.